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다른 게 아니라 틀린 겁니다 (문단 편집) === 괄호 속의 불의와 침묵 선호 === > "조곤조곤한 페미니즘에는 동의하지만 [[메갈리아]]의 과격한 언사는 문제라고 비판하는 남자들은 ... 이렇게 말한다. 오, 나는 너의 목소리를 경청할 생각이지만 볼륨을 조금만 줄이면 좋겠어. 아니 조금만 더. 아니 지금도 시끄러워. 그리고 목소리가 [[음소거|완전히 소거]]된 후 그는 말한다. 그래, 이게 내가 원하던 네 목소리야. 결국 그들이 원하는 것은 합리적 토론도 무엇도 아닌 여성들의 [[침묵]]일 뿐이다. 그것이 [[오빠가 허락한 페미니즘]]의 최종 목적지다... > > ...조금 거칠게 도식화하자면, 여기엔 침묵에 대한 선호, 결코 공격적인 요구로 구체화되지 않는 조용함에 대한 선호가 있다. 침묵하는 대상에 대해선 미안함을 안고 살 수 있지만, 목소리를 내는 이들에 대해선 순수성을 의심한다." > ----- > - pp.100; 279-280 본서의 부제에서부터 언급된, "괄호 속의 불의" 라는 것은 무엇일까? 사실 이것은 이미 [[강준만]] 교수가 자신의 저서 《[[오빠가 허락한 페미니즘(도서)|오빠가 허락한 페미니즘]]》 에서 진단했던 것과도 다르지 않다. 저자 및 강준만 교수가 동의하는 부분은, 우리 사회에 장기간의 억압의 역사가 있었으나, 그 피억압자들이 침묵함으로써 불의가 괄호 속에 가려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소위 "나는 조곤조곤 말하는 페미니즘만 지지한다" 고 말하는 것은, 이들의 관점에서는 "나는 (지금까지 여성들이 그렇게 고통스럽게 차별을 받아 온 [[맥락]]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조곤조곤 말하는 페미니즘만 지지한다" 로 독해된다. 위의 예시 문장에서 추가된 괄호가 바로 저자가 페미니즘에 대한 남성들의 반응을 해석하는 방법론이다. 저자는 페미니즘에 대한 반응으로서, "억압의 역사" 에 관련된 내용을 괄호 속에 넣어서 추가했을 때 그것이 위선이 되는지 진정성이 되는지 판별하고자 한다. 저자가 직접 언급하는 사례로서 "없던 여혐도 생긴다", "잠재적 우군을 내쳤다" 같은 표현들도 마찬가지다. 여혐이 없던 사람들이라고 지칭되는 사람들은, 실상은 불의를 괄호 속에 묶어서 지워놓고 여혐이 없는 척하고 있었던 사람들인 것이며, 잠재적 우군이라고 지칭되는 사람들은, 실상은 불의를 괄호 속에 묶어서 지워놓았던 [[공모자들]]에 불과한 것이다. [[성차별]]이 엄존하는 현실에서 여성들이 반발하지 않고 침묵하기만을 바란다면, 그 사람들은 여혐이 없는 게 아니라 여혐을 교묘하게 가리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저자가 출판 전에 추가한 후기에서도 언급했듯이, 괄호 속의 불의라는 표현의 요지는 우리 사회가 [[페미니즘]]으로 인하여 '혐오의 총량' 이 증가한 것이 아니라, 기존에는 보이지 않았던 혐오의 일각이 [[페미니즘]]을 통해서 비로소 수면 위로 가시화되었다는 것이다. 즉, 페미니즘이 백래시를 유발 내지 생성한 것이 아니라, 페미니즘이 백래시를 적발 내지 폭로한 것이라고 보자는 얘기다. 저자는 설령 이처럼 비가시적인 혐오일지라도 그것 또한 사회 전체적인 혐오의 구조를 유지할 수 있다고 말한다. 불의를 괄호 속에 가려놓은 사람들은, 따라서 피억압자들의 항의의 목소리로 인해서 혐오의 총량이 증가하게 된다고 잘못 이해한다. 그 결과로 그들은 피억압자들이 가능한 한 항의를 하지 않고 쥐 죽은 듯이 침묵하기를 원한다. 저자에 따르면, 그런 사람들은 아무런 항의 없이 묵묵히 침묵하는 (것처럼 보이는) 피억압자들에게는 전폭적인 선의를 드러내 보인다. 저자는 [[강동수]] 소설가의 소설집 《언더 더 씨》 에서 불거진 [[세월호]] 희생자 모욕 논란을 그 사례로 든다. 강동수는 '접신한 [[무당]]' 으로 자처하는 방법으로 세월호 희생자의 입을 빌려서 '젖가슴', '즙액' 같은 선정적인 묘사를 했는데, 이것이 대외적으로는 사회를 통렬하게 비판한다고는 했지만 막상 실제로는 그 사람 개인의 억울함을 표출하기 위해 고인의 목소리를 함부로 도용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점을 여성들이 비판하자, 세월호에서 희생된 여고생들에게는 한없이 친절하던 강동수는 매우 신경질적으로 반응했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말 없는 고인 여성]]에게는 (목소리를 마음껏 빼앗아 쓸 수 있으므로) 웃는 얼굴로 대하지만, 자신이 듣기 거북한 목소리를 내는 살아있는 여성에게는 화난 얼굴로 대한다는 게 저자의 비판이다. 결과적으로 침묵하는 약자들은 강자에 대한 의존을 전제하는 것이므로, 강자로부터의 우호적인 대접을 받는 은혜(?)를 입을 수 있다. 하지만 침묵하지 않는 약자들은 그 강자로부터 "나도 너희들에게 우호적이지만, 너희들이 목소리를 낸다면 너희들의 편을 들지 않겠다" 는 피드백을 받게 된다. 결국 침묵하지 않는 약자들 입장에서는 이것이 하나의 기만책이라고밖에는 느껴지지 않게 된다. 저자가 보기에 이것은 하나의 시대적 분위기라고도 할 수 있다. 구조적인 피해를 입고 무거운 책임에 짓눌리면서도 날을 세우기보다는 [[지금 너만 힘든 줄 아냐|끝까지 묵묵히 견디는 것이 가장 고결하고 고귀하다]]는 사회적 합의가 존재한다는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